사찰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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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찰대본산 용주사에 대해...

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염거화상(廉居和尙)에 의해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로서, 청정한 수행처이자 국가적 법석(法席)으로 자리 잡았던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염거화상은 당대의 높은 덕망을 지닌 선승으로, 갈양사를 선(禪) 수행의 중심 도량으로 세우고 많은 수행자를 지도하며 불법을 널리 펼쳤습니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혜거국사(慧炬國師)께서 *중창(훼손된 사찰을 다시 중건, 정비하는 것)을 단행하며 갈양사의 법맥을 더욱 빛내셨습니다. 혜거국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크게 열어 사찰을 국가적 축원도량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수륙대재(水陸大齋)는 갈양사, 지금 용주사의 대표적인 법회로 자리 잡아, 나라와 백성은 물론, 수륙 도처에 떠도는 영가들의 넋을 위로하고 불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거대한 불교 의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며 병자호란 등 전란을 거치면서 사찰은 소실되고 폐사되었으며, 한동안 그 법등이 꺼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절을 다시 일으켜 왕실의 원찰(願刹)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듯하여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부친의 넋을 위로하고자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불리는 이곳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아 이곳에 절을 세워 능사(陵寺)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정조는 절의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명명하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절의 낙성식 날 저녁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정하며, 이곳을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효심의 본찰(本刹)로 삼고 불심과 효심이 함께하는 수행처로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

이후 용주사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 중 하나로 성장하여, 전국 5규정소(糾正所,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 한 곳이 되어 승풍을 바로잡았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한편, 용주사는 근대 불교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일찍이 31본산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걸쳐 100여 개의 말사 및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용주사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이르며, 정기적인 법회와 다양한 포교 활동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하여 효(孝)를 중심으로 한 불교 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실천하고, 현대인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효행을 통한 불교적 가치 전파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용주사는 수행자들이 모여 참선하며 진리를 찾는 도량이자, 대중 포교를 통해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을 실천하는 살아 있는 수행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용주사입구

융건릉에서 병점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이 넓게 트이면서 용주사 천왕문이 나타난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의 이 문은 창건당시에는 없었으나 1980년 이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새로 지었다.
양옆으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어 온갖잡귀와 악신을 물리쳐 절을 수호한다.

창건

용주사의 창건에 대해 안내해드립니다.

역사

용주사가 세워진 자리는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의 옛터였습니다. 갈양사터는 천여년 전인 신라시대 때 이미 부처님의 복전(福田)이 가꾸어졌던 곳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갈양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으나 신라말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제2세였던 염거화상(廉居和尙~ 844)이 창건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용주사의 범종(국보 제120호) 오른쪽 옆면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연기(緣起)성황산(成皇山) 후신 화산(花山)의 갈양사 후신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 5월에 창건되었고, 동시에 이 범종을 주조하였다.
- 불기 2950년 7월 주기 석(釋) 송굴(松屈) 대련(大蓮)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기록은 1923년 당시 주지였던 강대련(姜大蓮, 1875~1942) 스님이 적은 것으로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 넣었다는 기록입니다. 또다른 범종 뒷면에는 창건주 염거스님의 명문도 새겨 있는데,

성황산(成皇山) 갈양사 범종 한 구를 석(釋) 반야(般若)가 2만5천근을 들여 주성(鑄成)하였다.
- 금상(今上) 16년 9월 0일 사문 염거(廉居)


명문의 내용을 보면 염거화상이 생존했던 신라시대에 범종을 조성하면서 명문을 함께 새겨넣은 것으로 되어있지만, 금상십육년(今上十六年)이라는 연기표현은 신라시대에는 없었던 표기법이고 더우기 범종은 양식적으로 보면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명문은 범종이 만들어진 이후 후대에 추각(追刻)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염거화상 이후 갈양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인데, 고려 제 4대 광종(光宗)21년(970), 혜거국사가 수주부(水州府, 수원의 옛이름)의 갈양사가 산수가 빼어나 국가대만대의 복지(福地)를 위하여 국가의 영원한 축원도량으로 삼으라 하여 임금이 이에 따라 갈양사를 고려왕조의 원찰(願刹)로 승격시켜 국가의 축원도량으로 삼았으며, 혜거국사는 이곳에서 참선수행에 몰입하고 조계종풍을 드날리다 974년 12월15일 입적하였습니다. 국가의 지원과 보호에 의해 법등(法燈)이 끊이지 않고, 적지 않은 고승대덕이 배출되었을 것이 분명하나 안타깝게도 갈양사는 잦은 병난의 과정에서 절 자체가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범종의 명문탁본

수호 용주사에 있는 유물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범종이다. 뒷면에 반야가 조성하고 염거가 기록한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이는 신라 때의 글이 아니라 후대에 추각된 것이다. 더욱이 범종은 양식적으로 볼 때 고려초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배경

조선왕조가 전기간을 통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불교는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조선 5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던 가운데도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세조대(世祖代)나 명종대(明宗代)와 같은 불교부흥의 시기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새롭게 창건된 사찰도 의외로 상당한 숫자에 이릅니다. 또한 성리학 관료들의 서슬퍼런 감시 속에서도 역대 비(妃)·빈(嬪)들의 신불행위는 그칠줄 모르는등 그 나름대로의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불교에 대한 획일적인 이해태도는 앞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주사는 정조(正祖)라는 당대의 군주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성리학의 통치이념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사찰창건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시대의 군주·관료·왕비 등이 보여주었던 신불활동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검토하다 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한 많은 수의 인물들이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성리학이 일상생활의 생활규범으로 인식됨과 아울러 정치 철학의 통치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반면, 불교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 즉 종교로서의 위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용주사 창건도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하는 직접적인 배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지극한 효심에서입니다.
화성 융릉. 경기역사문화유산원. https://gjicp.ggcf.kr/


융릉

사도제자와 경의왕후를 모신 능이다.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과 함께 융건릉으로 불린다. (사적 제206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마음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선( ),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였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였습니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자《한중록(閑中錄)》의 작자로 유명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1735~1815). 사도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는데 그가 이처럼 어린 나이에 세자의 책봉을 받았던 건 그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이미 사십의 나이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한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효경(孝經)을 외웠다고 하며, 7세때에는《동몽선습(童蒙先習)의 내용을 완전히 익혔으며, 또한 수시로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이미 군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하게 갖추었지만 당파의 정략적 음모와 계략으로 갑작스럽게 기행과 패륜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자를 둘러싼 노론(老論)·소론(少論)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부왕과 세자의 원만했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어린 시절부터 노론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냈던 세자가 정사를 맡게 되자 노론세력과 그 동조세력인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숙의문씨(淑儀文氏) 등이 세자를 계속 모함하였으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여 수시로 세자를 꾸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종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세력의 영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았고, 이어 1761년(영조 37)과 그 이듬해에 걸친 나경언(羅景彦)등의 상소로 인해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조는 열한살의 나이로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고 비록 할아버지인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즉위 이후에 보여준 그의 효성스러움을 본다면 얼마나 부친의 죽음에 대해 비통스러워 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5세가 되던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부친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당쟁의 탕평을 위해 진력, 즉위하자 곧 부친을 장헌세자로 추존(追尊)하였으며, 노론의 당론을 앞세우던 벽파(僻派)의 일당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부친의 죽음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을 홀로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해주었고, 노론에 세력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의 젊은 관료들도 적극 등용하였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세손시절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홍국영(洪國榮)마저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탕평의 노력으로 인해 정조대는 정치·사회·문화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일부에서는 이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정조의 치적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정사 못지않게 비명에 간 부친을 추모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대표적 성군(聖君)으로 세종(世宗)과 정조를 들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모습, 즉 탁월한 정치능력과 풍부한 인간미가가 겸비된 데서 따르는 평가인 것입니다. 아래에 소개되는 일화는 정조가 얼마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 양주땅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긴 정조대왕은 자나깨나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져간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경(還京)길에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陵寺)를 당부하곤 하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러치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총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대왕의 눈에 띄자 순간 대왕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하느냐" 하고 송총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대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 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隆建陵) 주변에서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용주사가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음도 정조의 정신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용주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정조의 왕권 강화의 노력과 불교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점이며, 수원성의 축조, 사도세자묘의 천릉(遷陵), 용주사의 창건 등의 사례가 왕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왕실의 능침사찰(陵寢寺刹) 건립이 100여년 이상 중단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용주사 창건을 추진하였다는 사실과, 용주사 이후에는 능침사찰의 건립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없이는 창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또한 재위 초기에 억불의 성향을 보이던 정조가 불교관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과정

수원능행도
지극한 효성을 간직한 정조는 즉위 이후에 부친을 추모하는 일과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첫번째로는 존호(尊號)를 고치는 일로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된 부친의 신분을 다시 세자로 복원시켰으며 그 이름을 장헌(蔣獻)이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사당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은 1764년 (영조 40) 봄에 북부의 순화방(順和坊)이라는 곳에 세웠다가 같은 해 여름 동부의 숭교방(崇敎坊)에 옮겨 지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지어졌으며 그 이름도 수은묘(垂恩廟)에서 경모궁으로 바꾸었지만 부친의 묘가 원(園)이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효성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묘 이전 작업은 1789년 즉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되서야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조금 의문점이 남지만 그가 수원지역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여러 대규모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심지여는 행궁(行宮)을 짓고 도읍까지 옮기려 했다는 점을 본다면 부친의 묘를 둘러싼 일종의 웅대한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는 추측입니다. 특히 수원성은 당대의 북학파(北學派)를 중심으로 한 실학사상가들이 동원되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工法)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용주사의 창건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 1789년 10월 7일)이라 한 후로부터 4개월 뒤 용주사의 창건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묘의 이전과 동시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게 합니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정조는 처음 불법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우연히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이라는 스님을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바치자 그것을 읽고 마음에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합니다.

수원능행도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가지로 설명하지요,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가 네 번째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는 다섯 번째지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것이 그 여섯 번째이고,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은 일곱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말하고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것이 아홉 번째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가 열 번째입니다."

이에 감동받은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했으며 보경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경을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主寺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리하여 용주사는 대단히 큰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고, 창건자료집 각항택일(各項擇日)과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두 자료를 종합하여 본다면 주요 공사 기간은 7개월여 정도 소요됨을 알 수가 있는데, 사찰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7개월이라는 공기(工期)는 대단히 단축된 것입니다.

또한 창건에 동원된 인적 구성과 재물의 양을 통해 쉽게 알려주는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는 큰 시주를 한 96명의 고위관료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龍主寺建築時各道化主僧)이라는 자료엔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지방의 책임을 맡은 승려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보경당 사일(寶鏡堂獅馹)과 성월당 철학(城月堂哲學)이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 (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제목 그대로 각 궁고 호조·병조등의 중앙관청, 그리고 서울의 각 가게에서 전국에 이르기 까지 분야별로 시주한 내용이실려있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창

1920년대 전경 당시까지는 삼문이 절의 첫 입구였고 그 앞에 홍살문 모양의 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절의 모습은 창건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원래의 건물에 낡고 기운 곳을 바꾸고 바로잡아 큰 골격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와서 많은 전각이 새로 들어섰고 1983년 서정대 주지스님이 취임한 후 1985년 불음각의 신축을 시작으로 1986년에 중앙선원, 1987년에 매표소, 1988년에 효성각, 그리고 1993년에 천불전을 조성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중앙선원은 침체된 선종의 맥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스님의 각별한 원력이 이룬 결실입니다.

배경

조선왕조가 전기간을 통하여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을 시행하였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불교는 인류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조선 500여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철저하게 탄압을 받았던 가운데도 비록 일시적이기는 하였지만 세조대(世祖代)나 명종대(明宗代)와 같은 불교부흥의 시기도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새롭게 창건된 사찰도 의외로 상당한 숫자에 이릅니다. 또한 성리학 관료들의 서슬퍼런 감시 속에서도 역대 비(妃)·빈(嬪)들의 신불행위는 그칠줄 모르는등 그 나름대로의 발전과 쇠퇴를 거듭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불교에 대한 획일적인 이해태도는 앞으로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주사는 정조(正祖)라는 당대의 군주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성리학의 통치이념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사찰창건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시대의 군주·관료·왕비 등이 보여주었던 신불활동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와 관련된 각종 기록을 검토하다 보면 신분 고하를 막론한 많은 수의 인물들이 불교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고, 성리학이 일상생활의 생활규범으로 인식됨과 아울러 정치 철학의 통치이념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반면, 불교는 많은 수의 사람들에게 신앙의 대상, 즉 종교로서의 위치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정조의 용주사 창건도 바로 이런 점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가 용주사를 창건하는 직접적인 배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지극한 효심에서입니다.
화성 융릉. 경기역사문화유산원. https://gjicp.ggcf.kr/


융릉

사도제자와 경의왕후를 모신 능이다. 정조와 그의 비 효의왕후를 모신 건릉과 함께 융건릉으로 불린다. (사적 제206호)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마음

사도세자는 영조(英祖)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선( ), 자는 윤관(允寬), 호는 의재(毅齋)였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暎嬪李氏)였습니다. 부인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딸이자《한중록(閑中錄)》의 작자로 유명한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1735~1815). 사도세자는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는데 그가 이처럼 어린 나이에 세자의 책봉을 받았던 건 그의 이복형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일찍 죽고, 영조가 이미 사십의 나이를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한 기질을 보였다고 합니다.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효경(孝經)을 외웠다고 하며, 7세때에는《동몽선습(童蒙先習)의 내용을 완전히 익혔으며, 또한 수시로 시를 지어 대신들에게 나누어 줄 정도로 이미 군왕이 될 수 있는 자질을 충분하게 갖추었지만 당파의 정략적 음모와 계략으로 갑작스럽게 기행과 패륜을 일삼게 되었습니다.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 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세자를 둘러싼 노론(老論)·소론(少論)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부왕과 세자의 원만했던 관계도 점차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즉 어린 시절부터 노론에 대해 적개심을 나타냈던 세자가 정사를 맡게 되자 노론세력과 그 동조세력인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숙의문씨(淑儀文氏) 등이 세자를 계속 모함하였으며 영조도 이에 동조하여 수시로 세자를 꾸짖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자는 이러한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고 일종의 정신질환까지 앓게 되었으며 계속되는 비행은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세자를 보좌하던 소론세력의 영수 이종성(李宗城)이 탄핵을 받았고, 이어 1761년(영조 37)과 그 이듬해에 걸친 나경언(羅景彦)등의 상소로 인해 8일 동안 뒤주 속에 갇혀 있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정조는 열한살의 나이로 이러한 비극을 목격했고 비록 할아버지인 영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고 있었지만 즉위 이후에 보여준 그의 효성스러움을 본다면 얼마나 부친의 죽음에 대해 비통스러워 했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25세가 되던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먼저 부친 죽음의 원인이 되었던 당쟁의 탕평을 위해 진력, 즉위하자 곧 부친을 장헌세자로 추존(追尊)하였으며, 노론의 당론을 앞세우던 벽파(僻派)의 일당인 홍인한(洪麟漢)·정후겸(鄭厚謙)·홍상간(洪相簡)·윤양로(尹養老) 등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부친의 죽음과 정치를 혼동하지 않았으며 부친의 죽음에 관련되었던 외조부 홍봉한(洪鳳漢)을 홀로된 어머니를 생각하여 사면해주었고, 노론에 세력기반을 둔 북학파(北學派)의 젊은 관료들도 적극 등용하였습니다. 아울러 자신의 세손시절부터 큰 은혜를 입었던 홍국영(洪國榮)마저 제거하는 과단성을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탕평의 노력으로 인해 정조대는 정치·사회·문화적인 안정과 번영을 누렸으며, 일부에서는 이시기를 '조선시대의 문예부흥기'로 평가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정조의 치적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는 정사 못지않게 비명에 간 부친을 추모하는 일에도 열정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대표적 성군(聖君)으로 세종(世宗)과 정조를 들고 있음도 바로 이러한 모습, 즉 탁월한 정치능력과 풍부한 인간미가가 겸비된 데서 따르는 평가인 것입니다. 아래에 소개되는 일화는 정조가 얼마나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통해 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됩니다.

「 양주땅 배봉산(拜峰山)에 있던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花山)으로 옮긴 정조대왕은 자나깨나 비명으로 원통하게 숨져간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불현듯 부왕이 그립다거나 전날밤 꿈자리만 고약해도 효성이 지극했던 대왕은 손수 능을 찾아 살핀 후 환경(還京)길에 꼭 용주사에 들러 능사(陵寺)를 당부하곤 하였다. 찌는 듯이 무더운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날도 대왕은 바쁜 국사를 잠시 물러치고 현륭원을 참배한 후 주위를 돌고 있었다. 그때 문득 송총이가 솔잎을 갉아먹는 것이 대왕의 눈에 띄자 순간 대왕의 눈에서는 파란불이 일었고 온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송충이를 잡아둔 정조는 비통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네가 아무리 미물인 곤충이라지만 이리도 무엄할 수 있단 말이냐! 비통하게 사신 것도 마음 아픈데 너까지 어찌 괴롭하느냐" 하고 송총이를 이빨로 깨물어 죽여버렸다. 대왕의 돌발적인 행동에 함께 갔던 시종들은 모두 당황해 하다가 달려들어 송충이를 모두 없애 버렸다.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융건릉(隆建陵) 주변에서는 송충이를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위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간절한 효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은 바로 이러한 정조의 효심이 불심으로 승화되어 이룩된 것이며, 오늘날까지 용주사가 '효의 근본사찰'로 인식되고 있음도 정조의 정신이 사찰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용주사 창건의 또다른 배경으로 정조의 왕권 강화의 노력과 불교관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점이며, 수원성의 축조, 사도세자묘의 천릉(遷陵), 용주사의 창건 등의 사례가 왕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기 위한 정책적 배려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조선왕실의 능침사찰(陵寢寺刹) 건립이 100여년 이상 중단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용주사 창건을 추진하였다는 사실과, 용주사 이후에는 능침사찰의 건립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사실에서 강력한 왕권의 뒷받침없이는 창건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며 또한 재위 초기에 억불의 성향을 보이던 정조가 불교관의 변화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과정

수원능행도
지극한 효성을 간직한 정조는 즉위 이후에 부친을 추모하는 일과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 첫번째로는 존호(尊號)를 고치는 일로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강등된 부친의 신분을 다시 세자로 복원시켰으며 그 이름을 장헌(蔣獻)이라 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사당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은 1764년 (영조 40) 봄에 북부의 순화방(順和坊)이라는 곳에 세웠다가 같은 해 여름 동부의 숭교방(崇敎坊)에 옮겨 지었는데, 정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지어졌으며 그 이름도 수은묘(垂恩廟)에서 경모궁으로 바꾸었지만 부친의 묘가 원(園)이라는 이름으로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그의 효성에 비추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사도세자의 묘 이전 작업은 1789년 즉 정조가 왕위에 오른 지 13년이 되서야 시작되는데, 여기에는 조금 의문점이 남지만 그가 수원지역에 대단한 집착을 보이면서 여러 대규모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심지여는 행궁(行宮)을 짓고 도읍까지 옮기려 했다는 점을 본다면 부친의 묘를 둘러싼 일종의 웅대한 정치적 계획을 추진하려 했다는 추측입니다. 특히 수원성은 당대의 북학파(北學派)를 중심으로 한 실학사상가들이 동원되어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공법(工法)에 의해 축조되었으며, 용주사의 창건은 사도세자의 묘소를 새로 조성하고 그 이름을 현륭원(顯隆園 1789년 10월 7일)이라 한 후로부터 4개월 뒤 용주사의 창건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묘의 이전과 동시에 추진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게 합니다.

세간에서 전하기를 정조는 처음 불법을 탄압하고자 하였으나 우연히 장흥(長興) 보림사(寶林寺)의 보경(寶鏡)이라는 스님을 만났는데, 그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바치자 그것을 읽고 마음에 느끼는 바가 컸다고 합니다.

수원능행도
"불교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가지로 설명하지요, 그 첫째가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 주신 은혜, 둘째는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셋째는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잊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또한 쓴 것은 삼키고, 단 것을 뱉어 먹이시는 은혜가 네 번째요,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시는 은혜는 다섯 번째지요.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것이 그 여섯 번째이고,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 주시는 것은 일곱 번째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덟 번째는 먼 길을 떠났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를 말하고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것이 아홉 번째 은혜,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가 열 번째입니다."

이에 감동받은 정조는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했으며 보경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임명하고 용주사를 창건토록 하였으며 이로 인해 보경을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主寺都摠攝)을 겸하게 하였다. 또한 《은중경》 판목을 새겨 용주사에 소장하게 하였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이리하여 용주사는 대단히 큰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고, 창건자료집 각항택일(各項擇日)과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두 자료를 종합하여 본다면 주요 공사 기간은 7개월여 정도 소요됨을 알 수가 있는데, 사찰의 규모나 중요성에 비해 7개월이라는 공기(工期)는 대단히 단축된 것입니다.

또한 창건에 동원된 인적 구성과 재물의 양을 통해 쉽게 알려주는 대시주진신안(大施主縉紳案)에는 큰 시주를 한 96명의 고위관료들의 명단과 관직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용주사건축시각도화주승(龍主寺建築時各道化主僧)이라는 자료엔 용주사 창건을 위해 각지방의 책임을 맡은 승려 명단이 실려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 보경당 사일(寶鏡堂獅馹)과 성월당 철학(城月堂哲學)이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용주사의 창건과정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자료인 팔로읍진여경각궁조전시주록 (八路邑鎭與京各宮曹廛施主錄)에는 제목 그대로 각 궁고 호조·병조등의 중앙관청, 그리고 서울의 각 가게에서 전국에 이르기 까지 분야별로 시주한 내용이실려있는데, 용주사의 창건은 가히 범국민적 동원이 이루어진 역사(役事)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창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염거화상(念居和尙)께서 갈양사를 창건하여 수행과 교학이 함께 이루어지는 도량으로 삼으셨습니다. 이후 고려 시대에 이르러 혜거국사(惠居國師)께서 사찰을 중창하면서 사세를 더욱 확장하였으며, 왕실과의 깊은 인연 속에서 국가적 축원 도량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혜거국사께서는 갈양사를 선종(禪宗) 수행의 중심지로 발전시키고, 왕실과 사대부의 신심을 바탕으로 불법을 널리 전파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갈양사는 고려 시대 국가적인 법회와 의식이 거행되는 중요한 사찰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점차 외침과 전란을 거치면서 전각들이 불타고 사찰은 점차 쇠락하여 폐사(廢寺)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명복을 빌고 능을 수호할 원찰(願刹)의 필요성을 절감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폐허가 된 갈양사의 터를 다시 일으켜 1790년(정조 14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 보경스님을 중심으로 중창을 진행하였으며, 절의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하였습니다. 이번 중창은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왕실의 효심과 불교 전통이 결합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용주사는 단순한 수행 도량을 넘어 왕실 원찰의 기능을 갖추었으며, 불교가 억압받던 조선 시대에 국가적으로 건립된 몇 안 되는 사찰 중 하나로서 특별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절의 모습은 창건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원래의 건물에 낡고 기운 곳을 바꾸고 바로잡아 큰 골격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와서 많은 전각이 새로 들어섰고 1983년 서정대 주지스님이 취임한 후 1985년 불음각의 신축을 시작으로 1986년에 중앙선원, 1987년에 매표소, 1988년에 효성각, 그리고 1993년에 천불전을 조성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습니다. 특히 중앙선원은 침체된 선종의 맥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스님의 각별한 원력이 이룬 결실입니다. 현재까지도 지속적인 중창과 불사정비를 통해 사찰의 원형을 유지하면서 수행과 포교의 줄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창건주 염거화상님의 다례재는 입적일 음력 9월 29일,
중창주 혜거국사님의 다례재는 입적일 음력 2월 15일에 맞춰 거행됩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효찰대본산 용주사 주소 : (18347)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전화 : 031-234-0040 팩스 : 031-234-2818 이메일 : yongjoo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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