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 염거화상(廉居和尙)에 의해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로서, 청정한 수행처이자 국가적 법석(法席)으로 자리 잡았던 유서 깊은 사찰입니다. 염거화상은 당대의 높은 덕망을 지닌 선승으로, 갈양사를 선(禪) 수행의 중심 도량으로 세우고 많은 수행자를 지도하며 불법을 널리 펼쳤습니다.
이후 고려시대에 이르러, 혜거국사(慧炬國師)께서 *중창(훼손된 사찰을 다시 중건, 정비하는 것)을 단행하며 갈양사의 법맥을 더욱 빛내셨습니다. 혜거국사는 고려 태조 왕건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며, 국가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법회를 크게 열어 사찰을 국가적 축원도량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수륙대재(水陸大齋)는 갈양사, 지금 용주사의 대표적인 법회로 자리 잡아, 나라와 백성은 물론, 수륙 도처에 떠도는 영가들의 넋을 위로하고 불법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 거대한 불교 의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조선 중기에 접어들며 병자호란 등 전란을 거치면서 사찰은 소실되고 폐사되었으며, 한동안 그 법등이 꺼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께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이곳에 절을 다시 일으켜 왕실의 원찰(願刹)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사도세자의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 듯하여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하여, 부친의 넋을 위로하고자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이에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불리는 이곳 화산으로 이장하여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아 이곳에 절을 세워 능사(陵寺)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정조는 절의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라 명명하였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절의 낙성식 날 저녁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한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에 절의 이름을 ‘용주사’라 정하며, 이곳을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효심의 본찰(本刹)로 삼고 불심과 효심이 함께하는 수행처로 자리 잡게 하였습니다.
이후 용주사는 조선 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중심 사찰 중 하나로 성장하여, 전국 5규정소(糾正所, 승려의 생활을 감독하는 곳) 중 한 곳이 되어 승풍을 바로잡았으며, 팔로도승원(八路都僧院)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통제하는 역할도 수행하였습니다.
한편, 용주사는 근대 불교계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일찍이 31본산 중 하나로 자리 잡았고, 현재는 수원, 용인, 안양 등 경기도 남부 지역에 걸쳐 100여 개의 말사 및 암자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현재 용주사의 신도는 약 7천여 세대에 이르며, 정기적인 법회와 다양한 포교 활동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널리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하여 효(孝)를 중심으로 한 불교 신행관과 인성교육을 실천하고, 현대인들도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효행을 통한 불교적 가치 전파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용주사는 수행자들이 모여 참선하며 진리를 찾는 도량이자, 대중 포교를 통해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을 실천하는 살아 있는 수행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용주사입구
융건릉에서 병점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쪽이 넓게 트이면서 용주사 천왕문이 나타난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의 이 문은 창건당시에는 없었으나 1980년 이후에 경내를 정비하면서 새로 지었다.
양옆으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어 온갖잡귀와 악신을 물리쳐 절을 수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