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큰스님

본문 바로가기
서브 헤더

용주사를 관장했던 주요인물은 크게 두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용주사에 머물면서 수행에 전념하였던 스님과 용주사의 사상적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노력했던 스님들로서
이들은 용주사가 사찰로 존재할 수 있게 하였던 가장 중요한 인물들입니다.
둘째는 용주사의 물질적 기반이 되어주었던 단월세력(檀越勢力)을 들 수가 있는데
이들은 용주사가 창건되고 또 운영되는 과정에서 많은 물질적·행정적 도움을 주었던 인물들입니다.
어느 사찰을 막론하고 그 사찰이 존재하면서 사격(寺格)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두 부류의 인물이 상호역할을 해왔으며 용주사 또한 이런 주요인물들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일, 철학

두 스님은 용주사 창건을 주도하였던 대표적 인물로 용주사 창건을 위해 조직된 물교계에서 각각 8도도화주(八道都化主)와 부화주(副化主)를 맡으면서 실질적인 창건주로써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들에 대한 임명이라든가 창건 공사의 총 지휘는 정조의 권한이었겠지만 용주사 창건에 있어서의 역할은 대단히 컸던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보경당 사일은 정조의 불심을 일으키게 하였던 장본인으로 여러 정황에 의한다면 정조와의 돈독했던 관계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분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로 장흥군(長興郡)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 출신이란 단편적인 내용이《조선불교통사》에 실려 있을 뿐이고, 용주사 창건 뒤 바로(1790년 10월) 왕으로부터 팔로도승통(八路都僧統)과 용주사도총섭(龍主寺都摠攝)의 승직을 명받는다는 <교지(敎旨)> 내용 이외에 다른 행적을 알 길이 없습니다.

철학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용주사 창건 때의 팔도부화주와 경기·전라 양도의 도화주 책임을 맡고 있었다는 행적이 전부입니다. 다만 앞서 소개한 바 있는 <대사주진신안>이라는 자료의 서문을 지은 등운(等雲)이 그의 글 속에서 철학을 자신의 스승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볼 때, 철학에서 등운으로 이루어지는 사제관계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악대사

인악대사님
인악대사(仁嶽大師, 1746~1796)는 용주사 창건때 정조의 명으로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을 얻고 있던 고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정조의 특별한 부탁을 받기까지 했으며 1797년(정조21) 제자 성안(聖岸)이 편집 간행한《인악집(仁嶽集)》은 그의 시문(詩文)을 수록한 책인데, 여기에는 <용주사불복장봉안문>외에 <경찬소(慶讚蔬)>·<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 등 모두 세 편의 용주사 관련기록이 실려 있습니다.인악스님의 속성(俗姓)은 이(李)씨로 법명은 의첨(義沾)으로 1746년(영조 22) 경불 달성의 인흥촌(仁興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스님은 8세때 향학(鄕學)에 들어 갔는데, 《소학(小學)》을 세 번 읽고 모두 외우는 등의 뛰어난 자질을 보임으로써 인근 마을에까지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또한 15세때에도 《시경》·《서경》·《역경》을 모두 읽고 글도 잘 지음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더욱 총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8세가 되어 용연사(龍淵寺)에서 공부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심하고 벽봉화상(碧峰和尙)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스님은 뛰어난 수행력과 정진을 바탕으로 당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특히 당시 화엄학의 종사(宗師)이던 설파(雪坡)는 스님을 '당금(唐今)의 동량이료, 후세의 규구(規矩)'라고 칭찬하며, 잡화엄(雜華嚴)을 비롯해 선송(禪頌)등을 가르쳤습니다.

스님은 비슬산·팔공산·황악산·계룡산·불영산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행과 설법을 거듭하다가 동화사(桐華寺)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1790년(정조 14) 정조가 부친의 원당으로 수원의 용주사를 지으며 당시의 명승으로 이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스님도 선출되어 세 종의 재문을 지었으며 정조가 그 내용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1760년 (정조 20)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향년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한 비는 지금 동화사에 세워져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악집》 《화엄사기(華嚴私記)》《금강사기(金剛私記)》《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등이 있습니다.

강대련

강대련(姜大蓮, 1875~1942)스님은 용주사 뿐 아니라 한국 근세 불교사에서도 큰 오점을 남긴 인물로 평가됩니다.
호는 금허(錦虛), 대련(大蓮)이고 첫 법명은 보영(寶英), 속성은 강(姜)씨로 경남 진주 출신으로 14세때 부친이 죽자 금강산 장안사에서 부친을 천도하고 진허(震虛)스님에게 출가하였습니다. 1901년 순헌비(淳獻妃, 고종의 계비)로부터 만금(萬金)을 받아 해은암(海恩庵) 자렝 해광전(海光殿) 등을 신축하였습니다.

1906년에도 다시 순헌비에게서 6천원을 하사받아 해인사 대장경판 정장(釘裝)을 보수하고 불경 1,400권을 간행하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하면서 빠진 책을 보충하게 하였으며, 1911년 용주사의 주지로 부임했으며, 1914년 11월25일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설립하였고, 이 모임은 해인사 주지 회광(晦光)·법주사 주지 진하(震河)등 수십 인이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는데, 회광이 그 대표자였고 대련은 부회주를 맡았고, 또한 용주사 주지를 계속 맡고있던 그는 1915년 조선사찰 30본산 연합사무소를 각황사에 두고 그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참여했던 이들 두 단체는 대표적 친일불교 단체로 평가됩니다.1919년 10월 사이토 총독에게 제출한 <조선불교기관 확장 의견서>라는 일종의 건의서는 그의 불교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료입니다.

일본의 조선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으로서는 이를테면 일본 스님과 우리 나라 양반 자제들과의 결혼같은 것을 적극 주선해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거꾸로 우리나라 스님과 일본귀족들과의 통혼을 주선해 본다면 이건 또 어떠할 것인가.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할 망설입니다. 더욱이 이 내용이 3·1운동의 기운이 채 가라 앉지도 않은 1919년 10월에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하면 형언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친일 행각은 불문(佛門)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22년 3월 각황사에서 열린 「불교유신회」모임에서 김상호(金尙昊)등 청년스님 100여명이 대련의 친일 행각을 성토한 후,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大惡魔姜大蓮 鳴鼓逐出)'이라고 쓴 장대를 들고 북을 두드리며 종로거리를 행진한 이른바 '명고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후로도 총독부의 웅호를 계속 받으면서 입적할 때까지 일정한 형태의 권한을 계속 지닐 수 있었지만, 역사속에서 그의 과오는 절대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행각으로 인해 용주사라든가 기타 사찰에 대한 그의 순수 불교활동도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은 물론입니다.

전강대종사

전강대종사
전강대종사(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합니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스님의 행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합니다.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믇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불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계속해서 용성(龍城)·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됩니다. 이후 33세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또한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을 차례로 지냈으며, 스님은 이후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15여년에 걸쳐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선풍은 제자 송담(松潭)스님이 용주사에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 하였습니다. 끝으로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5년 1월13일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습니다. 스님은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게 의해 출판됨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강스님 오도송(悟道頌)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 밖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류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 구나.


만공스님 전법게(傳法偈)

示 田岡永信(시 전강영신)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부처와 조사도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고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오늘 가을 빛 저물어 가니
猿嘯在後峯(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鏡虛門人 滿空(경허문인 만공)

인악대사

인악대사님
인악대사(仁嶽大師, 1746~1796)는 용주사 창건때 정조의 명으로 <용주사불복장봉안문(龍珠寺佛腹藏奉安文)>이라는 글을 써주면서 이곳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는 당시 불교계에서 명망을 얻고 있던 고승이었으며 이로 인해 정조의 특별한 부탁을 받기까지 했으며 1797년(정조21) 제자 성안(聖岸)이 편집 간행한《인악집(仁嶽集)》은 그의 시문(詩文)을 수록한 책인데, 여기에는 <용주사불복장봉안문>외에 <경찬소(慶讚蔬)>·<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 등 모두 세 편의 용주사 관련기록이 실려 있습니다.인악스님의 속성(俗姓)은 이(李)씨로 법명은 의첨(義沾)으로 1746년(영조 22) 경불 달성의 인흥촌(仁興村)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스님은 8세때 향학(鄕學)에 들어 갔는데, 《소학(小學)》을 세 번 읽고 모두 외우는 등의 뛰어난 자질을 보임으로써 인근 마을에까지 신동(神童)으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또한 15세때에도 《시경》·《서경》·《역경》을 모두 읽고 글도 잘 지음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더욱 총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18세가 되어 용연사(龍淵寺)에서 공부를 하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출가를 결심하고 벽봉화상(碧峰和尙)에게 나아가 구족계를 받았습니다. 이후 스님은 뛰어난 수행력과 정진을 바탕으로 당대 고승들을 찾아다니며 많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특히 당시 화엄학의 종사(宗師)이던 설파(雪坡)는 스님을 '당금(唐今)의 동량이료, 후세의 규구(規矩)'라고 칭찬하며, 잡화엄(雜華嚴)을 비롯해 선송(禪頌)등을 가르쳤습니다.

스님은 비슬산·팔공산·황악산·계룡산·불영산 등지를 유력하면서 수행과 설법을 거듭하다가 동화사(桐華寺)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1790년(정조 14) 정조가 부친의 원당으로 수원의 용주사를 지으며 당시의 명승으로 이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스님도 선출되어 세 종의 재문을 지었으며 정조가 그 내용을 보고 경탄해마지 않았다고 합니다. 1760년 (정조 20) 비슬산 명적암(明寂庵)에서 향년 51세, 법랍 34세로 입적한 비는 지금 동화사에 세워져 있습니다.
저서로는 《인악집》 《화엄사기(華嚴私記)》《금강사기(金剛私記)》《기신론사기(起信論私記)》등이 있습니다.

강대련

강대련(姜大蓮, 1875~1942)스님은 용주사 뿐 아니라 한국 근세 불교사에서도 큰 오점을 남긴 인물로 평가됩니다.
호는 금허(錦虛), 대련(大蓮)이고 첫 법명은 보영(寶英), 속성은 강(姜)씨로 경남 진주 출신으로 14세때 부친이 죽자 금강산 장안사에서 부친을 천도하고 진허(震虛)스님에게 출가하였습니다. 1901년 순헌비(淳獻妃, 고종의 계비)로부터 만금(萬金)을 받아 해은암(海恩庵) 자렝 해광전(海光殿) 등을 신축하였습니다.

1906년에도 다시 순헌비에게서 6천원을 하사받아 해인사 대장경판 정장(釘裝)을 보수하고 불경 1,400권을 간행하여 금강산 정양사(正陽寺)에 봉안하면서 빠진 책을 보충하게 하였으며, 1911년 용주사의 주지로 부임했으며, 1914년 11월25일에는 각황사(覺皇寺)에서 <불교진흥회>를 설립하였고, 이 모임은 해인사 주지 회광(晦光)·법주사 주지 진하(震河)등 수십 인이 발기인으로 참석하였는데, 회광이 그 대표자였고 대련은 부회주를 맡았고, 또한 용주사 주지를 계속 맡고있던 그는 1915년 조선사찰 30본산 연합사무소를 각황사에 두고 그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그가 참여했던 이들 두 단체는 대표적 친일불교 단체로 평가됩니다.1919년 10월 사이토 총독에게 제출한 <조선불교기관 확장 의견서>라는 일종의 건의서는 그의 불교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자료입니다.

일본의 조선통치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님으로서는 이를테면 일본 스님과 우리 나라 양반 자제들과의 결혼같은 것을 적극 주선해 본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거꾸로 우리나라 스님과 일본귀족들과의 통혼을 주선해 본다면 이건 또 어떠할 것인가. 참으로 경악을 금치 못할 망설입니다. 더욱이 이 내용이 3·1운동의 기운이 채 가라 앉지도 않은 1919년 10월에 쓰여진 글이라고 생각하면 형언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결국 그의 이러한 친일 행각은 불문(佛門)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1922년 3월 각황사에서 열린 「불교유신회」모임에서 김상호(金尙昊)등 청년스님 100여명이 대련의 친일 행각을 성토한 후, 그의 등에 북을 지우고 '불교계대악마강대련 명고축출(佛敎界大惡魔姜大蓮 鳴鼓逐出)'이라고 쓴 장대를 들고 북을 두드리며 종로거리를 행진한 이른바 '명고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이후로도 총독부의 웅호를 계속 받으면서 입적할 때까지 일정한 형태의 권한을 계속 지닐 수 있었지만, 역사속에서 그의 과오는 절대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이러한 행각으로 인해 용주사라든가 기타 사찰에 대한 그의 순수 불교활동도 부정적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은 물론입니다.

전강대종사

전강대종사
전강대종사(1898~1975)는 현대 한국의 대표적 고승이자 용주사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합니다. 입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용주사 대중들에게 크게 추앙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스님의 행장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스님의 속성은 정(鄭)씨이며 전남 곡성출신으로 부친은 해룡(海龍), 모친은 황계수(黃桂秀)로 1914년 해인사에서 인공화상(印空和尙)을 득도사(得度師)로, 제산화상(霽山和尙)을 은사로, 응해화상(應海和尙)을 계사(戒師)로 출가하였으며 영신(永信)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1918년 해인사 강원에서 대교과(大敎科)를 수료한 뒤, 도반의 죽음을 보고 무상함을 느껴 김천 직지사(直指寺)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 제산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불철주야 정진하고, 이후 예산 보덕사(報德寺), 정혜사(定慧寺) 등에서도 수행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의 수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덩어리 같은 피가 코와 입으로 흘러 나오거나 머리가 터져 삭발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하며, 특히 100일 동안 자지않고 수행한 일화는 유명합니다.스님은 23세가 되던 1921년 드디어 크게 깨달은 후 오도송(悟道頌)을 남겼으며, 이후 당대의 선백들을 찾아가 인가(印可)를 받았는데, 1923년 금강산 지장암의 한암(漢巖)스님을 찾아가자 한암스님이 믇기를 "육조스님께서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 일렀지만, 나는 본래무일불이라 하여도 인가를 못하겠으니 그대는 어떻게 하여 인가를 받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손뼉을 세 번 치고 물러나왔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계속해서 용성(龍城)·혜월(慧月)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을 찾아갔다가 더욱 큰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스님은 처음에 만공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지 못했다가 재발심을 하고 다시 정진하였으며, 마침내는 전법게(傳法偈)를 전수받으면서 선종 제 77대의 법맥을 계승하게 됩니다. 이후 33세때인 1931년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의 조실(祖室)을 시작으로, 1934년 법주사 복천선원(福泉禪院), 1936년 김천 수도선원(修道禪院), 1948년 광주 자운사(紫雲寺)등 전국 유명선원의 조실을 두루 역임하였습니다.또한 1955년부터 해남 대흥사(大興寺) 주지, 담양 보광사(普光寺) 조실, 인천 보각사(普覺寺) 조실을 역임하였고 1959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60년 망월사(望月寺) 조실을 차례로 지냈으며, 스님은 이후 1961년 인천 용화사(龍華寺)에 법보선원(法寶禪院)을 개설하여 15여년에 걸쳐 후학 지도에 전념하였습니다.

이러한 스님의 선풍은 제자 송담(松潭)스님이 용주사에서 오늘날까지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1962년 대구 동화사 조실, 1967년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조실 및 조계종 장로원 장로를 역임하였으며, 1969년 용주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하고 용주사 선풍 진작에 크게 공헌 하였습니다. 끝으로 1974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조실을 역임한 스님은 1975년 1월13일 앉은 채로 입적에 들었습니다. 스님은 특히 수행자들을 위한 수많은 설법 테이프를 남겨 놓았으며, 《전강법어집이 제자들에게 의해 출판됨으로써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전강스님 오도송(悟道頌)

昨夜月滿樓(작야월만루) 어젯밤 달빛이 누각에 가득하더니
窓外蘆花秋(창외노화추) 창 밖엔 갈대꽃 가을이로구나.
佛祖喪身命(불조상신명) 부처와 조사도 몸과 목숨을 잃었는데
流水過橋來(류수과교래) 흐르는 물은 다리를 지나오는 구나.


만공스님 전법게(傳法偈)

示 田岡永信(시 전강영신)
佛祖未曾傳(불조미증전) 부처와 조사도 일찍이 전하지 못하였고
我亦無所得(아역무소득) 나 또한 얻은 바 없다네.
此日秋色暮(차일추색모) 오늘 가을 빛 저물어 가니
猿嘯在後峯(원소재후봉) 원숭이 휘파람은 뒷산 봉우리에 있구나.

鏡虛門人 滿空(경허문인 만공)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효찰대본산 용주사 주소 : (18347)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

전화 : 031-234-0040 팩스 : 031-234-2818 이메일 : yongjoosa@naver.com

Copyright © 용주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