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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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을 지나 절 경내에 들어서면 한 눈에 대규모의 누각이 정면에 나타납니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천보루. 1790년 절의 창간 당시 지어진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누각인데 도편수는 경상도 영천 은해사(銀海寺) 쾌성(快性)스님이 맡았고, 강원도 삼척영은사(靈隱寺)의 팔정(八定)스님이 단청을 하였습니다.
천보루의 아래층은 대웅보전으로 향하는 통로로써 여섯 개의 목조기둥아래 높다란 초석이 건물을 받들고 있는데, 기둥을 받치는 초석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가 석조기둥과 같이 커다란 규모입니다. 대체로 사원건축에서는 목조기둥을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고 이러한 석조기둥은 주로 궁궐건축에서 사용됩니다. 절의 창건이 왕실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진 것임을 알게 해주는데, 대웅전을 정면에 두고 오른쪽 벽면에는 별석으로 부모은중경을 한글로 새겨 절을 찾는 참배객들에게 효심을 불러 일으키게 합니다.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맞닿아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 회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창건당시 그대로의 모습인데 사원건축이라기 보다는 마치 대갓집을 연상케 합니다. 나유타료와 만수리실은 모두 외정(外庭)으로 출입문이 나있고 또한 툇마루가 부속되어 있습니다. 외정 쪽의 방들은 외사랑에 해당하고 내정 건너 안채가 위치하는 이러한 구조는 민가(民家)의 건물양식 그대로입니다.
나유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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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유타료는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普賢事) 의섭(儀涉)스님이 도편수를 맡았고 창건 당시에는 승당(僧堂)이라고 불렸으며 한편 이덕무가 여러 건물의 주련을 지었는데 지금은 모두가 바뀌었으나 나유타료의 글귀만은 창건 당시의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부처가 알지못한 곳에 바로 이르렀어도 다만 이는 과정일 뿐이니
다시 부모미생전의 한구절로 도는 시험해보세.
直 佛祖不知處 祇是半塗且向父母未生煎 試道一句
총면적 86평으로 현재 대중회의때 사용하는 큰 방 스님들의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큰 방 내부의 중앙에는 용상방(龍像榜)이 걸려 있는데, 용상방은 결제(結制)나 큰 불사가 있을 때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 직책과 해당자를 명시하여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는 방입니다. 내용을 보니 조실(祖室) 고(故) 전강대종사(田岡大宗師), 원장(院長) 송담대선사(松潭大禪師), 선덕(禪德) 노학대선사(老鶴大禪師)를 비롯한 30개의 직명과 스님이름이 적혀있어 중앙선원을 중심으로 한 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이미 고인이 된 전강대선사가 조실로 올라 있다는 점인데. 이는 선원장인 송담선사께서 당신생존까지는 선사를 항상 조실로 모신다는 서원을 세웠던 까닭이라하니 참으로 본받을 만한 정성이라 하겠습니다.
만수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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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리실은 원래 선당(仙堂 또는 禪堂)이라고 하여 강원도 간성 건봉사(乾鳳寺) 운붕(雲朋)스님이 도편수를 맡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덕무가 쓴 만수리실의 주련이 당시 있었으니 그 글귀에
도솔궁속에서 큰 게송을 말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반야대위에서 참된 법을 연습하여 무량겁을 초탈하네
兜率宮中稟大偈 普濟衆生 般若臺上演眞詮
라고 하였습니다. 총면적 86평으로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루어져 객실로 사용합니다. 천보루의 2층에는 앞뒤로 난간을 둘렀고 익공계 이익공이 섬세합니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인데 양끝의 처마가 날렵하게 보입니다.
-천보루
여기서 특이하게도 천보루의 누각이름이 안쪽에는 차우(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로 '홍제루(弘濟樓)'라고 쓰여있습니다. 밖에서는 천보루, 안에서는 홍제루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려집니다.
원래는 천보루였으나 후대에 홍제루라는 별호가 추가되었는데, 그 의미를 굳이 풀이하자면 밖으로는 하늘[天]이 보호[保]하는 곳이고 안으로는 널리 백성을 제도한다[弘濟]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겠습니다.
홍제루 현판의 동쪽 종루(從樓) 벽면에는 일제강점기에서 이름있었던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을 비롯한 30인의 문인묵객들이 당시 강대련 주지를 위해 기념휘호한 글들을 모아 판각해놓은 목판이 걸려있습니다. 창건당시 천보루의 앞뒷면에는 이덕무가 지은 주련을 달았었는데 글귀는 다음과 같습니다.
앞면
기러기·사자·비둘기 모양으로 나투는 여러 부처, 여러 천신이 영원히 보호하고, 소, 사슴, 양을 탄 선남 선녀가 한결같이 귀를 기울이네
뒷면
연화게와 패엽경을 불이문중의 하늘소리이고, 향기로운 밥과 창포떡은 무량겁전의 비옥한 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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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각의 내부중앙에는 번암 채제공이 찬술한 <용주사상량문>이 목판으로 판각되어 있습니다. 측면에는 조선후기에 제작된 길이 2.44m의 목어가 잉어 모양으로 비늘, 지느러미 등을 사실적으로 갖추고 살아있는 듯이 걸려있습니다.
목어는 물속에 사는 모든 생명들을 안온시키기 위한 것으로 조석예불과 각종 의식때 두드리는 것입니다. 내부는 82평으로 현재는 각종 법회, 특히 용주사 어린이, 청년회 등의 정기적인 법회장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천보루는 하나의 궁궐건축으로 지어졌으며 건물명칭이 그러하고, 궁궐과 같이 난간을 둘렀으며 좌우로 연결된 나유타료·만수리실이 이를 말해줍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면서 용주사에 자주 참배하였는데 천보루는 이러한 때를 대비해 행궁규모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1993년 5월 외부단청을 새롭게 하여 화사한 빛깔이 부처님의 지혜광명을 나타내는 듯 합니다.